컴퓨터 하드디스크가 고장 났다. 검색해보니 사람들은 이런 경우에 하드디스크가 죽었다는 표현을 썼다. 그런데 하드디스크는 혼자 죽지 않았다. 그 녀석은 백업을 안 한 내게 물귀신 작전을 썼다.
2014년부터 2024년까지 정리 해 온 데이터가 날아갔다. 무려 10년의 기록이 사라졌다. 자료를 되살린단 희망은 일찍 접었다. 큰일 난 상황이지만 이상하게도 내 마음은 평온하다. 없어진 것을 위해 글을 쓴다. 이렇게나마 지난 내 10년을 기록한다.
○ 데이터 리스트
- 사진
- 전시회 자료
- 작업
- 글
- 각종 서류
이 자료들은 하드디스크 용량을 가득 채울 만큼 내게 중요했다. 하지만 덧없이 사라져 버리자 이 자료 덩어리가 진짜로 내게 중요했는지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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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디스크가 죽은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업무용 파일이 날아갔을까봐 마음을 졸인다. 그러나 내 마음은 열어보지도 않았던 사진들 때문에 조마조마했다. 나는 반항 기질이 있어서 형식적인 자료로 나를 증명하는 시스템에 의문을 가진 사람이다. 그래서 자료가 날아갔을 때 업무용 서류나 기록자료 따위는 되찾지 못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딱딱한 글자로 날 대변하던 자료가 사라진 이 사건이 마음에 들었다. 마치 게임처럼, 내 인생에 ‘재시도’ 버튼을 누른 듯 후련했다. 그렇게 쿨한척 하면서도 사진폴더를 잃어버린 것엔 눈물버튼이 눌렸다.
10년 동안 사진을 모았다. 그 사진이 없어졌다고 내가 통째로 사라진 기분이 들었다. 이별한 사람 마냥 베개에 얼굴을 박고 울다가 문득 깨달았다. 사진을 모은 건 내 집착이었다. 내가 걸어온 길을 부정하지 말란 집착. 나는 상상 속에서 내 모습을 왜곡하는 버릇이 있다. 자책하는 마음이 튀어나올 때마다 ‘사진 속 아이에게 감히 욕할 수 있냐’고 반론하기 위해 증거처럼 사진을 꽉 쥐고 있었다. 사람은 흔히 과거에 발목을 잡히니까. 사람은 쉽게 스스로를 미워하니까. 내가 선택하며 쌓아온 인생을 존중하고 싶었다. 나에게 사진은 지금의 나를 증명해주는 존재였다. 내가 사진을 모으던 집착은 나의 장점과 단점도 다 끌어안고 싶었던 오기였다. 헛수고다 헛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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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설국』 – 가와바타 야스나리
소설의 주인공 시마무라는 설국에서 만난 고마코와 유코를 마주하며 인생의 덧없음을 느낀다. 그는 고립된 촌에서 살아가는 두 여인의 노력이 부질없다 생각한다. 더 나아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 역시 헛수고라 말한다.
결국 모든 행위가 부질없다면 사랑도, 노력도 다 필요 없는 걸까? 이 소설은 일본소설 답게 슬픔에서 피어나는 미의식이 강하게 느껴진다. 마지막 장면에서 소설의 주제가 선명해진다. 흰 눈이 가득 쌓인 겨울. 마을 고치창고에서 화재가 난다. 창고는 붉게 타오르지만 하늘엔 푸른 은하수가 흐른다. 불로 인해 눈이 녹아 주변은 질퍽질퍽 더러워지고, 화재로 건물이 무너져 창고 2층에 있던 유코는 땅으로 떨어진다. 생명이 위태로운 유코를 붙들고 고마코는 절규한다. 그 모든 상황을 앞에 두고 시마무라는 고개를 들어 은하수를 본다. 소설의 결말은 허무함이 절정에 이른다. 이런 결말을 맞이하면 머리에 물음표가 찍힌다. 하지만 작가는 소설 안에 여러 묘사와 장치를 통해 허무를 뛰어넘는 열정에 대한 찬사를 보낸다.
‘헛수고’란 어떠한 보람 없이 애쓰는 행위나 수고를 뜻한다. 냉정한 시각으로 삽질하는 사람을 보면 그의 노력이 부질없다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에는 허무를 뛰어넘는 열정이 있다. 우리는 그 열정을 기억해야한다. 비록 열정에 따른 결과가 눈 녹 듯 사라질지라도 가슴이 뛰는 곳을 향해 움직여야한다. 순수한 자는 큰 빛을 내며 붉게 타오를 것이다. 노력을 아는 자의 마음에 은하수처럼 반짝이는 감동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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