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본 전시는 역사를 품고 살아온 제주의 자연과 사람들을 살펴본다. ‘붉은 흙’은 4.3항쟁을 끌어안은 제주와 사람들을 상징한다. 이는 아픔을 딛고 성장할 수 있었던 근원의 힘을 뜻한다. 작품을 통해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진 긍정성을 찾는 기회를 마련한다.

붉은 흙

그날따라 당신은 신나 보였다. 마치 놀러 가는 아이처럼. 목적지로 빨리 가고 싶었는지 발걸음도 빨랐다. 당신 목소리엔 기대감이 섞였다. 이 날을 위해 몇 번이고 현장답사를 다녀왔다며 자랑했다. 당신은 닳은 관절 때문에 거동이 편치 않았다. 그러나 몇 번을 멈추더라도 가고야 마는 성격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거침없는 행동력에 고집이 더해졌다. 당신의 생은 녹슨 자전거 페달을 밟을 때처럼 삐걱대는 소리가 났다.

그런 당신이 부담스러웠다. 짧은 대답으로 당신의 노력에 감사하는 척했다. 입꼬리를 올려 당신 기분을 맞추려 노력했지만, 끌려온 자의 억지스러움은 감출 수 없었다. 영혼 없는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당신은 크게 웃었다. 무뚝뚝한 내가 자신과 닮았다며 호탕한 척하는 그 모습은 더욱 싫었다.

당신은 내 진심이야 어찌 됐든 듣고 싶은 말만 들으면 되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기분 내키는 대로 일을 벌였고, 그 뒤처리는 고스란히 내 몫이었다. 나는 당신에게 인정받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다혈질인 당신 때문에 곤욕스러운 일이 많아졌다. 관계가 벌어지며 싸우는 일이 잦았다. 이번에는 어떤 일을 맞닥뜨리게 될지 가늠이 안 됐다.

당신의 딱딱한 성격은 어디에도 들어맞지 않았다.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감각은 분노로 변했다. 자신의 감정을 쓰레기 던지듯 타인에게 내던졌다. 마치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몸부림이었다. 질릴 대로 질린 나는 당신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미련 없이 버렸다. 설령 나 자신이라도 말이다.

당신을 향한 내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숙여 당신과 거리를 두며 걸었다. 그렇게 우린 송악산에 도착했다.

나에겐 첫 송악산이었다. 바람에 깎인 절벽에선 돌이 떨어졌고, 크지 못한 나무들 아래로 풀이 무성했다. 그리고 유난히 흙이 붉었다. 풍경을 다 짚을 새도 없이 당신은 날 앞질러 걸어갔다.

내가 알기로 당신은 송악산을 끼고 평생을 살았다. 자신의 추억을 공유하고 싶었는지 과묵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지고 말이 많아졌다. 몰아치는 바람과 뜨거운 햇볕은 오히려 회상의 선명도를 올려줬다. 당신의 굵은 손가락이 산 여기저기를 가리켰다. 시선이 닿은 곳마다 어린 시절 당신이 뛰어다니는 듯했다. 친구들과 낚시하고, 곤충을 잡고 노는 아이가 그려졌다. 당신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밝은 미소를 지었다. 세월이 깃든 얼굴 사이로 순수함이 느껴졌다.

해안선이 보이는 벼랑에서 당신은 누군가의 이름을 내뱉었다. 당신과 비슷한 이름. 나와도 같은 성. 그러나 낯선 이름이었다. 몇 걸음 걷고서 말을 이어갔다.

그는 학교에서 수업받다가 끌려갔어.

아무것도 모른 채. 누가 손가락질했다는 이유만으로.

송악산 어딘가, 붉어진 땅 위로 시체가 쌓여있었어.

거기서 그를 찾았어.

몸에 총구멍이 있었어. 저 동굴 보여? 저기서 총에 맞았을 거야.

오르막길에도 전혀 흐트러짐 없는 목소리였다. 앙상한 팔다리를 휘적이는 걸음걸이가 부드러웠다. 먼 곳을 내다보는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났다.

몸이 경직됐다. 전혀 몰랐던 이야기에 당황했다. 당신은 나와는 다르게 자유로워 보였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어떤 모습과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불편한 사이가 유지되길 바랐다. 그래야 당신에게 마음을 열지 않을 수 있었다. 우리가 가족임을 일깨워주는 것들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이 두려움은 내가 고안해 낸 방어벽이었다. 그러나 당신의 갑작스러운 고백으로 내 마음에 조금씩 금이 갔다.

어릴 적 기억이 떠올랐다. 당신과 함께 4.3 평화공원에 갔었다. 어린 나는 그저 당신 뒤를 따라다녔다. 4.3 희생자 추념식에 참석해 위패 봉안소에서 그의 이름을 봤었다. 시력이 안 좋은 당신을 대신해 까치발을 들면서 열심히 위패를 찾았었다. 다정한 칭찬과 들뜬 마음. 가족 나들이의 추억이었다.

내 안에 억눌렸던 마음이 꿈틀댔다. 심연에 머물던 감정이 밖으로 나오길 원했다.

우리는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답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자신이 없었다.

나는 튀어나오는 감정을 억누르며 묵묵히 땅만 봤다. 땅 위엔 당신의 앞선 발자국이 남아있었다. 나는 그 발자국을 굳이 피해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공터에 도착했다. 붉은 흙이 다 드러난 곳이었다. 그 흔한 풀도 나무도 없었다. 바람 소리조차 머물지 않는 장소였다. 당신은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곤 쪼그려 앉아 땅을 어루만졌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축 늘어진 목은 굽은 등으로 이어져 쓸쓸한 곡선을 그렸다. 그 뒷모습은 부러진 기둥같이 초라했다. 붉은 흙을 배경으로 당신의 흰머리가 더 두드러졌다. 긴 시간이 지나도 결국 그날로 되돌아가는 당신이 있었다. 회복되지 못한 땅과 결핍된 당신이 겹쳐 보였다.

당신은 땅에 닿은 손을 움켜쥐더니 힘겹게 일어나 멀찍이 떨어져 있는 나에게 다가왔다. 먼지가 날리며 매캐한 냄새가 났다. 당신은 나에게 흙 한 줌을 줬다. 얼떨결에 두 손을 뻗어 흙을 받았다. 날 향한 당신 손바닥엔 흙이 잔뜩 묻어 손금이 도드라졌다. 굵고 가는 선들은 여러 갈래의 길처럼 보였다. 당신의 손을 쭉 훑다 보니 흙이 잔뜩 올려진 내 손으로 시선이 이어졌다.

흙은 딱딱히 굳어있었다. 마치 자신의 모든 걸 어디에 주고 온 듯, 얇은 숨으로 겨우 생을 이어가고 있는 흙이었다. 이 흙에선 씨앗도, 생명도 못 살 것 같았다. 퍼석한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그 생생한 감각에 나는 몸이 굳었다.

이 연약한 흙을 손에 힘을 빼서 가볍게 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집착과 모순된 감정이 휘몰아쳤다. 뭐라도 반응해야만 할 것 같은 책임감이 올라왔다. 하지만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안 왔다. 당신과 소통하지않은 날들을 되돌아봤다. 지금껏 우리의 아픔을 외면하고, 거리를 둔 죄책감에 괴로웠다. 흙이 점점 붉어 보였다. 손에 힘을 꽉 주고서 흙 한 톨이라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그때 당신은 뒤돌아 갈 길을 갔다.

공터에 덩그러니 서 멀어지는 당신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당신은 따라가지 않는 날 재촉하지도,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당신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내 미세한 호흡만 들렸다.

만약 내 손에 쥐어진 이 흙이 당신의 무언가라면, 나는 이걸 어떻게 하면 좋을까?

순수한 시선으로 흙을 바라봤다. 흙은 그저 흙일 뿐이었다. 더 이상 붉어 보이지도,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이지도 않았다. 이 흙을 보듯 당신을 대한다면 나는 당신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흙을 으깼다. 굳은 흙 때문에 손이 아팠다. 자잘한 모래가 허공에 흩뿌려졌다. 손 위엔 작은 덩어리들이 남았다.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더 작고 가볍게 만들었다. 바람에 날아가고 땅과 섞여 자연스러운 자리에 도달할 수 있도록.

손을 비벼 남은 걸 다 털어냈다. 내 손도 흙을 건네 줄 때의 당신 손처럼 붉어졌다. 손톱, 지문, 살결 사이사이에 흙이 잔뜩 꼈다. 남은 흙가루에 손이 부들부들했다. 바람이 불었다. 나는 당신에게 달려갔다.

<붉은 흙>
허민경 개인전

전시장소 : 갤러리 애플
주소 : 제주시 연북로 399, 2층
날짜 : 11월 7일 금요일 ~ 15일 토요일
시간 : 11시~ 7시

기획 : 허민경
글 자문 : 김영란 시인
디자인 : YWY SYUDIO
인쇄 : 양양
주관, 후원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문화예술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