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와 연필

종이 위에 그어진 연필 선을 상상해보면, 우리는 쉽게 흰 배경과 검은 선을 떠올릴 수 있다. 이번엔 검은 종이와 연필 선을 상상해 보자. 어떤 모습이 떠오르는가? 실제로 연필 선은 흑연의 특성상 반짝반짝 빛나며 오묘한 은빛, 혹은 은은한 회색빛을 띈다. 연필은 검은색이라 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고정관념으로 인해 연필을 단순하게 검다고 인식해버린다. 즉 우리는 본모습 그대로를 인식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검은 종이에 연필로 작업했다. 작은 종이들이 모여서 하나의 큰 작업이 되는 형태다. 작업을 통해 인식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진짜가 맞는지. 그리고 이 무한한 삶에서 우리는 일부분만 보는 건 아닌지 말이다. 편향, 모순, 분별 등등 여러 작용 덕분에 뭐하나 확실하다 말 할 수 없다. 어떤 것이 진짜일까? 그리고 진짜는 존재할까?

그 의문 속에서 이번 전시 제목을 <붉은 흙>으로 지었다.(전시명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뭔가 강렬하게 느껴졌다. 디자이너가 포스터 만들 때 고생했다.) 나 역시 흙이 붉지 않은데 붉어 보였던 때가 있었다. 내 안에 격한 감정이 대상을 왜곡해서 인식했었다. 대상을 향한 오해는 결국 내 마음에 상처가 될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감정을 내려놓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기를 시도했다. 나빴던 것은 좋은 것이 될 수 있었고, 미움은 사랑을 대변하고 있었다.

전시는 내 개인적인 이야기에서 출발했다. (자세한 내용은 전시 글에 담았다.) 비단 나의 이야기만이 아닌, 세대를 걸쳐서 내려오는 이야기, 지금도 반복되고 있는 이야기다. 이 내용이 나만의 것이 아님을 알았을 때는 조금 슬펐다. 나는 더 이상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내가 말하는 특별함은 긍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그냥 내가 붙잡고 싶었던 아상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모두의 이야기라는 걸 받아들였을 때, 나는 이 이야기를 세상에 꺼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나는 내가 특별하다 생각하는 동안 외롭고 괴로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널리 퍼져 주변 사람들도 같이 힘들었다. 이 톱니바퀴를 재생의 과정으로 승화해 마침표를 찍고 싶었다.

이번 전시의 주제인 ‘흙’은 좋고 나쁨의 분별없이 모든 걸 품는다. 이는 흙의 영양분이 되고, 거기서 생명이 움튼다. 제주는 4.3 항쟁을 끌어안았다. 제주의 자연과 사람들의 강인한 재생력을 이번 기획에 담았다. <붉은 흙>은 아픔을 딛고 성장할 수 있었던 근원의 힘을 뜻한다. 우리는 과거에서 현재로, 지금에서 미래로 나아간다. 결과가 과정이 되며 이는 반복된다.

자연과 감정을 결합하며 작업했다. 땅, 바람, 그늘, 빛, 물, 하늘 등 언제나 풍요로우며, 우리를 품는 자연이다. 사람은 가끔 자연을 잊고 산다. 그리고 우리가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잊은 채, 감정과 직감도 뒷전일 때가 많다. 일상 중 자연의 멋진 광경과 마주 할 때의 황홀함을 떠올려보자. 언제나 있는 모습이지만, 그저 마주한 것 만으로도 특별한 순간이 된다. 혹은 감정이 올라오는 순간의 자신은 어떤 모습인가? 웃고 울며 솔직한 모습을 보일 땐 누구나 인간미가 넘친다.

나는 작업을 통해 감정을 마주하는 순간을 만들고 싶다. 그렇게 내 작업이 기능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거긴 내 영역이 아니다. 나는 그저 작업을 드러낼 뿐이다. 나도 사회의 일부로, 세상의 한 부분으로 작동한다. 그렇기에 나는 혼자가 아니며,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있다. 분별 없이. 있는 그대로. 순간을 살아간다.

글 자문은 멋지신 김영란 시인께서, 디자인은 멋쟁이 YWY STUDIO가 해줬다.

<붉은 흙>
허민경 개인전

장소 : 갤러리 애플
주소 : 제주시 연북로 399, 2층
날짜 : 2025년 11월 7일 금요일 ~ 15일 토요일
시간 : 11시 ~ 7시

후원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문화예술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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