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을 꽉 채운 쪽지 더미

누구를 기다리는 일은 참 좋다. 나는 A가 한국에 돌아온다면 함께 뭘 하면 좋을지 고민하는 재미에 푹 빠졌다. 추억이 깃든 곳에 여행을 하러 갈까, 새로운 곳을 소개시켜줄까. 여러 시나리오를 짜면서 기대에 부푼다. 모든 상상이 나의 욕심임을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다.

*

(2022년 9월에 쓴 글이다. #1, #2, #3)

#2. 올해 여름, 바다에 풍덩 빠져 몇 날 며칠을 놀았다. 그러던 어느 날 물고기 떼를 마주했다. 막상 생동감이 넘치는 물고기를 눈앞에 마주하니 나는 겁에 질려버렸다.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처럼 신비로운 느낌을 상상했지만, 난 겁쟁이였다. 내가 지금껏 인식해온 물고기는 그저 생선이었다. 물고기 떼에 압도당한 건지 내 선입견에 충격을 받은 건지, 놀라 까무러친 나는 파닥이며 물 밖으로 뛰쳐나왔다. 한참 동안 바다를 바라보았다. 차마 바다에 다시 들어갈 자신이 생기지 않았다. 반짝이는 파도에 눈이 부실 뿐이었다. 수면 너머에 있을 바다의 세상을 감당하기엔 난 아직 준비가 안 됐음을 느꼈다.

당시 L은 나에게 글을 써오라 했고, 나는 일기 같은 글을 써갔다. L은 내 글이 웃기다며 마음에 들어했고, 특히 저 부분을 좋아했다. 시간이 흘러 L은 나에게 이 글을 사람들 앞에서 낭독해달라 부탁했다. 그러나 나의 낭독은 L이 기대했던 모습과 달랐다.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지 못했고, L의 표정은 어두웠다.

*

기대하는 마음은 풍선과 같다. 크게 부풀 수록 터질까봐 두렵고, 작으면 성에 차지 않는다. 부풀어오른 기대감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바람이 빠진다. 결국 제자리면서도 결코 처음과 같진 않다. 늘어난 만큼 주름이 생긴다. 어찌보면 여유로움이다.

#1. 먹다 남은 커피, 쌓여있는 책, 걸지 못한 그림. 주변을 둘러보니 내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커피잔 속 얼음이 녹아 책상에 웅덩이가 생겼다. 바닥에 펼쳐진 책은 내용이 가물가물하다. 벽에 기대놓은 액자엔 먼지가 얇게 깔려있다. 고요한 방에 가득 차 있는 내 분신들이 아우성을 친다.

맛이 밍밍해진 커피를 다 마시겠다며 오기로 붙잡고 할짝댄다. 결국 다 마시지도 못할 거면서 묘한 책임감에 차마 버리질 못한다.

책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다 읽은 듯한 성취감이 다가온다. 음식 창고를 채우듯 욕심을 내며 책을 모았던 시절도 있었다. 마음속 결핍을 책으로 메우려 했나 보다. 이제는 아끼는 책만 남아 표지가 헐거워졌다.

방을 장식하고 있는 그림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업이다. 힘겹게 가져왔지만 아직 액자에 고리도 달지 못했다. 이 핑계로 그림을 가까이 마주 보고 있다.

나는 모순된 사람이다. 악을 쓰다가도 힘이 빠져 넘어가 버린다. 집착을 드러내지 않고 지긋이 옆에 둔다.

*

그냥 그렇게 서서히 알아간다. 다 내 욕심이구나.

#3 타오르는 불꽃이 서서히 바람에 식듯 뜨거운 마음도 죽이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불씨는 오랜 시간 동안 꺼지지 않고 살아있다. 나는 아직도 그 불에 데여 아파하다가도, 다가가 온기를 채운다. 다시 큰불이 일어나길 기대하고 있다. 연연하며 곱씹는 사람이 됐다.

서랍을 꽉 채운 쪽지 더미를 버렸다. 몇 년 동안 가득 차 있던 서랍이 텅 비었다. 서랍에 이것저것 새로운 것들이 들어온다.

댓글 남기기